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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세계여행 D+279 "그녀가 떠나고"

4번얼룩말 2020. 3. 7. 02:31

 

 

 

무기력하고 공허하다.

메뚜기가 떠난 빈자리는 적막하고 황량했다.

며칠간 다녔던 낯선 거리의 모습들이 오늘따라 더 낯설다.

 

혼자 여행하는 것보다 함께 여행하는 것이 두 배쯤 힘들었고

함께 여행하다가 혼자가 되는 것은 그보다 열 배쯤 더 힘들다.

 

시내를 목적 없이 걸었다. 하늘도 우중충하다.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메뚜기는 항상 서너 발자국 뒤에 있었다.

우리는 결국 그 서너 발자국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부르사로 떠나기로 했다.

메뚜기의 모습이 남아있는 이스탄불을 서둘러 떠나고 싶었다.

 

탁심광장에서 메트로를 타고 Yenikapi 역에서 내려서

선착장까지 10여분을 걸었다.

 

부르사 가는 배는 오후 3시에나 있다고 했다.

2시간 30분을 대합실에 멍하게 앉아 기다렸다.

 

부르사 가는 페리는 큰 배낭을 메고 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통로가 좁고 좌석이 많아서

큰 배낭을 앞에 두고 작은 배낭만 챙겨 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는 내가 앉자 다른 자리로 가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Mudanya에 내려서 Emek 역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부르사는 교통카드를 따로 구입해야 해서 번거롭다.

통합 교통카드가 생기면 좋겠다.

 

버스가 출발하고 커브길에 접어들자

뒷 문에 제 멋대로 놔둔 유모차와 캐리어들이 이리저리 쓰러진다.

하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물건 주인도 신경 안 쓰고 다른 사람들은 귀찮은 듯 발 옆에 온 캐리어를 툭툭 찼다..

 

그 한심한 꼬락서니를 두고 볼 수 없어서

유모차를 세워 큰 배낭으로 받치고

캐리어는 벽에 차곡차곡 기댄 뒤 다리로 막았다.

그제야 조용히 갈 수 있었다.

 

Emek 역에서 내려 숙소에서 가까워 보이는 Demirtaspasa 역에 일단 내렸다.

거리는 멀지 않아 보였다. 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을 뿐

휴대폰이 현재 위치를 잡는 동안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그녀는 터키어를 번역기로 돌려 어디 가냐고 묻는다.

 

방향 정도만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 싶어

숙소의 위치를 보여줬더니

지하철 계단을 몇 번이나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여기저기 묻고 숙소에 전화까지 걸면서 굉장히 열성적이었다.

 

이미 시간은 오후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BTS의 팬이라고 밝은 여자분은

괜찮으면 택시를 잡아주겠다고 말했다.

 

비싼 택시를 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나

살짝 비도 오는데 나 때문에 30분을 저러고 있으니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길을 아는 택시기사가 나올 때까지 몇 번을 묻고 한참을 걷다가

마침내 택시를 타고 감사인사를 전하며 헤어졌다.

 

택시에 타고나서 내비게이션을 켜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출발한다.

이 방향이 아니라고 했더니 괜찮다며 택시를 몰았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결국 도착한 호텔은 내가 예약한 호텔이 아니었다.

나를 도와줬던 그녀는 내가 예약한 호텔과 발음이 비슷한 다른 호텔로

착각해서 알려준 것이다.

결국 다시 택시에 타서 내비게이션을 따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점점 오르는 택시 요금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결국 25리라의 거금을 내고 숙소에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순수하고 따뜻한 호의를 뭐라 할 수도 없고 참 씁쓸했다.

 

서너 시간쯤 걸릴 줄 알았던 부르사는

오전 11시에 나와서 무려 9시간이나 걸렸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나는

근처 슈퍼에서 맥주와 나초칩을 사와서 먹었다.

 

오늘은 정말 이동 수단이 많았고,

중간중간 길도 많이 헤맸다.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함께였을 땐 길을 잃어도 이렇게 외롭지 않았는데

혼자라서 더 외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