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기록

세계여행 D+202 "ABC 트레킹 4일차"

4번얼룩말 2019. 12. 23. 17:17

루트 : 데우랄리 - MBC - ABC

 

8시 30분 데우랄리를 나섰다.

온통 하얀 설산이 눈 부시게 빛나고

하늘을 더할 나위 없이 푸르렀다.

햇빛에 반사된 구름이 투명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1시간 30분을 묵묵히 걷다 보면 

어느새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아점으로 신라면을 먹었다.

 

벌써 4일째

매일 먹는 신라면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안나푸르나에서 한국 라면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원래는 MBC에서 하루 고소 적응을 하고 ABC로 올라가려고 했다.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아서 바로 ABC로 올라가기로 했다.

ABC 가는 길에 독일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시누와를 걸을 때부터 일정이 비슷해 종종 마주쳤던 노부부다. 

아주머니는 정정하게 산을 잘 다니시고, 아저씨는 조금 힘들어하셨다.

아저씨는 MBC에 머물고, 아주머니 혼자 배낭 없이 ABC를 갔다가 내려온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축지법을 쓰듯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졌다.

 

ABC로 가는 길은 한마디로 고요한 적막이다.

세상의 소리가 모두 멈춘 듯 고요하다.

 

시공간이 모두 멈춰버린 동화 속 풍경.

흰 눈은 모든 풍경을 덮었고, 모든 소음을 덮었으며,

모든 번뇌를 덮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거친 내 숨소리 뿐이다.

 

ABC로 가는 길은 큰 오르막은 별로 없는 평이한 길이었다.

하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머리가 쿵쿵 쑤시고 속이 메스꺼웠다.

배낭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손에 힘이 풀려 스틱도 끌고 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을 헛디뎌서

무릎까지 오는 눈에 푹 빠져서 양말까지 싹 젖어서 몹시 추웠다.

 

이런 게 고산증세인가 싶었다.

빨리 ABC 롯지에 가서 눕고 싶었다.

 

내 애타는 바람과는 달리 

저 멀리 보이는 롯지는 전혀 가까워질 생각을 안 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더 멀리 달아다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안나푸르나를 제대로 감상하고

사진 찍을 여유도 없었다.

 

MBC 기준 2시간이라던 ABC에 3시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나는 가자마자 롯지 침대에 쓰러졌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으나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민하 씨는 고소 적응을 한다며 

더 높은 곳에 올라갔다 온다고 했다.

 

2시간쯤 자고 나니 한결 머리가 가벼워졌다.

그렇지만 고개를 좌우로 돌릴 때마다

통증이 계속되었다.

모든 동작을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려고 애썼다. 

 

어느덧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롯지 밖으로 나왔다.

MBC에서 바라본 풍경도 좋았지만

ABC에서 바라본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붉은 석양빛을 받은 설산과 구름들은

빨강, 노랑, 주황, 분홍이 뒤섞인 색깔들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심연의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올라온다.

 

어느 곳인지 모르나 

늘 그리웠던 향수가 어쩌면 이곳일까

 

언젠가 정체모를 그리움에 사무칠 때

나는 다시 히말라야를 찾게 될까

 

단언컨대 앞으로의 나의 여행에서도

히말라야를 능가하는 여행지는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

 

4일간의 힘든 여정을 버텨준 나의 몸에게 감사한다.

함께 여행길에 올라 준 메뚜기에게 감사한다.

길에서 만난 수 많은 동행에게 감사한다.

이 곳까지 오게 허락해주신 신에게 감사드린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