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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는데 아침이 되자 서서히 멎기 시작한다.

덕분에 덥지 않은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어제 과일가게에서 사둔 바나나로 요기를 한 뒤에

숙소에서 2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101번 버스를 기다렸다.

 

바투 페링기 해변과 스파이스 가든을 방문하기로 했다.

바투 페링기 해변은 딱히 수영할 것이 아니라서 버스로 지나가는 풍경만을 보고

바로 스파이스 가든으로 갔다.

500여 종의 식물이 있다는데, 열대우림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고요하고 신비한 비밀의 정원 같다.

입장료는 31링깃을 내고 들어가면 모기 기피제를 뿌려주시고, 영어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주신다.

처음 몇 개는 영어 듣기 평가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듣다가

이내 집중력이 떨어져서 목걸이로 걸고 다녔다.

향신료에 관심이 많고 보다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면 추가 비용을 내고 들을 수도 있다.

 

모기 기피제를 뿌렸지만 모기가 엄청 많아서 몇 군데 물렸다.

싫어하는 냄새를 뚫고서라도 기어코 내 피를 빨아먹겠다는 모기들을 보면서

지독한 냄새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두리안을 먹어버리는 인간의 식욕이 생각났다.

어쨌거나 식욕은 모든 생물의 가장 최상위 욕구이니 냄새쯤이야 버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한 블로그에서 봤던 식당이 떠올랐다.

글 하나만 믿고 가는 것은 모험인데, 산책이나 할 겸해서 다시 바투 페링기로 되돌아 갔다.

버스 세 정거장 정도의 코스라 제법 시간이 걸렸다.

바투 페링기 해변의 KFC가 있는 건물 4층의 Andrew's Kampung인데

이곳에 들리면 먹어봐도 괜찮은 음식점이다.

말레이시아 커리 치킨과 블랙 페퍼 비프 두 가지 모두 고기가 부드럽고 맛있고 양도 넉넉했다.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고 다시 101번 버스에 올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니

스르르 눈이 감긴다. 하지만 버스는 벌써 종점인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국립공원에서 유명한 몽키 해변까지 보트를 타고 가면 100링깃이고

걸어간다면 산길을 따라 3km 정도 걸어야 한다. 

 

입구에서 간단한 신상 명부를 적고 나서 산길을 걸어가는데

무료라서 그런지 관리가 잘 안 되는 느낌이다.

곳곳의 철제 난간은 녹이 슬거나, 재정비가 필요한 곳이 많았고

태풍으로 쓰러진 듯 보이는 나무나 철제 난간들도 그대로 방치가 되었다.

산길이 때로는 미끄러워서 등산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조금 걸어서 가니 원숭이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족히 5~6m 정도는 되어 보이는 높은 나무에서 아래 물 웅덩이로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다이빙을 즐기고, 다시 나무에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원숭이들이 수영을 그것도 다이빙을 즐기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신기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질 때는 더위에 지쳐서 수영을 하고 싶을 때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아냈다.

 

햇볕은 없지만 습도가 높아 매우 더운 상태에서

비도 살짝 내리고, 오전부터 많이 걸어서 다리도 조금 아프기 시작했다.

게다가 피피 섬 이후로 우린 새가슴이 되어 모험심이 줄어든 상태였다.

몽키해변을 뒤로 한 채 국립공원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오는데

중국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내가 앉은자리를 쿵쿵 치며 크게 뭐라고 하신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자리 양보를 원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약자 석도 아닌 데다가 빈자리도 2군데 있고

나보다 어려 보이는 다른 서양인들에게는 한 마디 못하는 그런 야비함 싫다.

굳이 내 자리에 앉겠다면 그게 배려를 바라는 사람의 태도인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먹는 나이를 벼슬처럼 생각하는 동양의 풍습이 그저 우습다.

배려는 서로 하는 것이고, 예의도 서로 차리는 것인데

괴팍한 늙은이 때문에 한 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이나 타운에 들려서 저녁을 조금 먹을까 했는데

문을 닫은 상점이 많았다.

엊그제는 너무 일찍 방문해서 문이 닫았는가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문 닫은 곳이 너무 많아 차이나 타운은 별로 갈 곳이 없다.

 

집 근처 타이 식당을 가서 볶음밥 2개를 시켰다.

종업원이 와서 1개에 2인분이다.라고 해서 하나 취소시켰더니

1.2인분 정도의 밥이 나왔다.

다시 시키면 음식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그냥 먹었다.

졸지에 우리는 우동 한 그릇 시켜서 나눠먹는 동화 속 아이들처럼

밥 하나 시켜서 나눠먹는 불쌍한 커플처럼 보였다.

동화 속에서는 한 그릇 더 주며 훈훈하게 끝나던데...

 

3일 내내 3만 보 이상 걸었더니 메뚜기가 조금 힘들어해서

내일은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